최고의 영화 - 영화의 역사나 학문적인 관점이 아니라 관객 입장에서 아주 잘 만들었고 재미도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다른 영화들을 보기 전에 미리 봐두어야 할 작품이라고까지 할 정도의 영화를 꼽아보려고 할 때마다 언제나 [펄프 픽션](1994)과 함께 [매트릭스](1999)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곤 합니다. 여기에 남부럽지 않게 훌륭했던 다른 영화들을 덧붙여 가며 Top 3, Top 5, Top 10... 이런 식으로 목록의 길이를 더 늘려갈 순 있지만 다른 영화들을 다 제외하고서도 마지막까지 남길 수 밖에 없는 최후의 걸작은 언제나 [펄프 픽션]과 [매트릭스] 단 두 편 뿐입니다.
1994년작 [펄프 픽션]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포스팅에서 정리를 했으니 이번은 [매트릭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고 영화를 자세하게 분석해놓은 좋은 글이나 심지어 논문들도 많기 때문에 저는 그저 개인적인 생각과 감상 몇 마디만 얹어 보겠습니다. 새로 글을 작성하기 위해 넷플릭스에서 [매트릭스]를 다시 감상했는데 다른 영화와 달리 최소한 대여섯 번 정도는 봤던 영화라 더이상 새로울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으나 막상 보다보니 그간 잊고 있었거나 예전에는 알아보지 못했던 디테일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역시 이 정도 급의 영화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보아도 크게 촌스럽지 않기도 하고, 무엇보다 다시 볼 때마다 새로운 점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네요.
미국에서는 1999년 3월, 한국은 그 보다 약간 늦은 5월에 개봉했던 [매트릭스]는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었죠. 제작비는 6천3백만불로 당시 왠만한 액션 장르 영화 한 편에 들어가는 그 정도였고 전세계 흥행 수익도 4억7천만불로 상당히 성공적인 편이었습니다. 지금은 성전환 수술로 라나 & 릴리 자매가 된 당시 래리 & 앤디 워쇼스키 형제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도 했죠. 연출 데뷔작이었던 전작 [바운드](1996)가 평단의 호평에 비해 흥행에서는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한 저예산 B급 영화였음에도 이들의 재능과 새로운 시나리오의 성공 가능성을 알아본 제작자 조엘 실버의 전폭적인 지원은 [매트릭스]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직접적인 배경이라고 하겠습니다.
(이하 스포일러)
[매트릭스]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매트릭스의 세계관에 대한 소개를 주인공의 시각에서 그려내는 전반부가 있고 두번째는 그러한 세계관 내에서 주인공이 인류의 구원자로서 각성하는 과정의 후반부입니다. 당시 관객들에게 충격적이었고 지금까지도 [매트릭스]를 회자되게 만드는 부분은 전반부의 세계관에 집중되는 편입니다. 후반부에서 다뤄지는 수퍼히어로의 각성과 성장은 오히려 신선도가 떨어지는 전형적인 면이 없지 않으나 그 앞에 펼쳐지는 매트릭스의 세계관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에 그런 세계관 안에서 탄생하는 새로운 수퍼히어로 역시 관객들로서는 신선하게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즉,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세계관을 제시하되 전체적인 서사는 낯설지 않게 구성한 작품이 [매트릭스]라고 하겠습니다.
대기업 프로그래머인 토마스 앤더슨(키아누 리브스)는 네오라는 이름의 해커이기도 한데 그런 덕분에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 안에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는 인물입니다. 감옥 같은 현실, 노예와 같은 삶에 대한 불만에 호소하고, 정의와 진실은 다른 어디엔가 은폐되어 있다는 식의 접근까지는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매트릭스]는 그 이전까지 (적어도 영화 장르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경지에서 해답을 제시했던 작품이었습니다. 모피어스(로렌스 피시번)의 안내에 따라 '진실의 방'으로 입장하기 위해 빨간색 알약을 선택한 앤더슨은 1999년을 배경으로 하는 가상현실로부터 벗어나 2199년의 현실 세계에서 눈을 뜨게 됩니다.
1999년작인 [매트릭스]의 커다란 성공으로 이후 2편과 3편이 동시 제작되어 2003년에 순차적으로 개봉하였고 작년에는 올드팬들의 관심을 끄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결국 '만들지 아니함만 못했던' 걸로 확인된 [매트릭스 : 리저렉션]까지 제작되기도 하였으나, 매트릭스 세계관 자체에 대해서 만큼은 [매트릭스] 1.5 또는 스핀오프라고도 할 수 있는 단편 모음집 [애니매트릭스](The Animatrix, 2003)의 에피소드 2편과 3편, [두번째 르네상스] 1, 2를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미래의 지구가 어떻게 태양빛을 볼 수 없는 환경으로 바뀌었고 인류는 어떻게 기계의 지배를 받고 급기야 재배 당하며 매트릭스의 세계 속에서 일생을 보내게 되었는지가 자세하게 묘사되는데 [매트릭스] 본편에서 이 부분은 모피어스의 아주 개략적인 설명으로만 다뤄지고 있습니다.
1999년의 매트릭스 안에서 프로그래머이자 해커로 살던 앤더슨이 그 보다 약 2백 년 정도 미래의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경험과 그 선택의 결과는 생각했던 만큼 기분 좋은 것은 결코 아니었죠. 비좁은 비행선 안에서 누더기 같은 옷에 매일 죽 같은 음식만 먹어야 하는 현실이 오히려 더 노예 같고 괴로울 수도 있다 보니 오히려 매트릭스로 되돌아가고 싶은 사이퍼(조 판톨리아노)와 같은 인물마저 생겨나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견디기 힘든 비참한 현실 환경과는 반대로 매트릭스 안의 세계 자체는 상상하는 모든 것이 가능한 무한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하죠. 트레이닝 프로그램에 제한되긴 하지만 빨간 드레스 입은 여인을 만들어 넣을 수 있기도 하고요. 매트릭스 안에서는 염력으로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이 아니라 숟가락이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어차피 인간에게 현실이라는 것의 정의 자체가 뇌가 인지하는 신호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매트릭스 안에서는 인간 자신이 그 신호를 제어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현실에 반영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여기서부터 중요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 믿음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처음에는 가상 현실에서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유로운 마음'을 강조하지만 애매하기만 한 오라클(글로리아 포스터)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네오(키아누 리브스)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모피어스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 그리고 모피어스를 요원들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는 네오의 용기와 믿음, 마지막으로 네오를 향한 트리니티(캐리-앤 모스)의 절대적인 사랑과 믿음이 매트릭스 안과 밖에서 죽은 네오를 다시 살려내기까지 하게 되는 것이죠.
[매트릭스]는 저멀리 [장자]의 호접지몽과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도 하고 트리니티, 느부갓네살, 시온 등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성서의 메시아 사상과 슈퍼히어로물에서 서사적 친숙함을 가져오기도 했으며 스타일 면에서는 홍콩 무술 영화와 갱스터 영화들, [공각기동대]와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매트릭스]는 [펄프 픽션] 만큼이나 후대의 수 많은 영화들에게 다시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고요. 하지만 애초에 모티브나 레퍼런스를 어디에서 가져왔든 [매트릭스]는 이미 그 자체로 최고의 원본이 되었고 다른 작품들의 레퍼런스 작품으로서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매트릭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들의 오감을 집중시키는 작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손 꼽히는 멋진 엔딩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매트릭스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되어 쏟아지는 총알 세례를 제어하고 매트릭스 세계의 절대 강자였던 스미스 요원(휴고 위빙)을 무찌르며 대각성의 단계에 오른 네오가 기계들에게 인류의 구원과 전쟁을 선포하고 나서 마치 슈퍼맨처럼 하늘 위를 솟구쳐 날아오르는 장면은 4년 뒤 [애니매트릭스]와 [매트릭스 2 : 리로디드], [매트릭스 3 : 레볼루션]으로 이어질 수 있게 만들었던 최고의 흥분제였죠. 아, 내친 김에 주말에 [리로디드]와 [레볼루션]까지 몰아서 다시 보기 하고 싶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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