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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방송

[영화] 헌트 (Hunt, 2022)

by 신어지 2022.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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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으로 지난 깐느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되었고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과 청룡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헌트]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어 감상했습니다. 감상평을 결론부터 먼저 얘기하자면 내용이나 만듬새, 영화적 재미까지 모든 면에서 예상했던 수준보다 훨씬 좋은 편이라서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깐느에서 7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기사를 저는 홍보성 과장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실제 작품을 보고나니 그 정도의 예우를 받는 건 너무 당연했던 거라 생각하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정재 배우가 깐느 영화제에 감독 데뷔작을 들고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오징어 게임]의 인기에 편승해서 감독 데뷔작 홍보를 아주 잘하시는구나 하는 정도였고 지난 8월 극장 개봉이 시작된 시점에도 액션 장면만 괜찮고 나머지는 역시나 그저 그렇다는 평을 들었었기 때문에 솔직히 영화 [헌트]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낮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혹시 지금도 [헌트]에 대해 별로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찾아가서 그럼 대체 이 보다 얼마나 더 잘 만들어야 한단 말이냐고 대신 따져주고 싶은 마음이네요.

 

 

장르의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이 정도의 완성도라면 [헌트]는 감히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2013)나 양우석 감독의 [강철비](2017) 옆에 나란히, 또는 그 중간 즈음에 놓여도 크게 모자라지 않는 수준이라고 생각됩니다. 유사한 컨셉의 한국 영화들 가운데 시도는 훌륭했으나 뭔가 부족했었던 수 많은 작품들을 떠올려보자면 이정재라는 배우의 감독 데뷔작이라서, 그리고 정우성과 공동 주연으로 우정의 수트핏을 자랑하며 총질하는 영화라는 이유로 외면했던 저의 편견과 선입견을 이제는 오히려 반성하게 됩니다. [헌트]는 한 편의 영화로서 완벽한 수준에 도달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를 받을 만한 별다른 이유도 잡아내기 힘든 확실한 웰메이드 영화입니다. 최근 넷플릭스 영화 부문 순위가 거의 무주공산이던데 이번 주말 이후 [헌트]가 2022년의 마지막을 뜨겁게 장식해줄 것으로 기대해봅니다.

 

넷플릭스 순위를 볼 수 있는 flixpatrol.com에서 찾아보니 [헌트]는 아직 한국에서만 공개된 상태라 영화 부문 글로벌 순위가 한참 아래에 있네요. 영어 등 각 나라별 자막과 함께 해외 쪽에도 공개되면 아마 관련 기사를 통해 다양한 반응과 소식들을 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하 스포일러)

 

 

[헌트]는 무엇보다 1980년대 제 5공화국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입니다. 안기부 내의 간첩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해외팀 박평호 차장(이정재)과 국내팀 김정도 차장(정우성)이 대립을 하게 되는데, 둘 중에 하나는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간첩이지만 다른 하나는 독재자를 처단하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려는 혁명 조직의 일원인 것이 밝혀집니다. 그렇게 간첩을 헌트하던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독재자 대통령을 헌트하는 영화로 바뀌게 됩니다. 영화의 홍보 카피로 "조직 내 침투한 스파이를 색출하라"가 있었지만 "대통령을 제거하라"라는 다른 카피도 모두 영화의 내용을 압축해서 알려주는 내용이었던 것이죠. 첩보물의 특성 상 불완전한 정보가 관객들에게 전달되다보니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고 상황의 반전이나 세부적인 사실들을 파악하기에는 한글 자막을 읽으면서 감상할 수 있는 스트리밍 환경이 더 적합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화의 시작과 함께 "1980년대를 배경으로 제작되었으나 모든 내용은 허구"라고 밝히고는 있지만 당시 신군부 정권의 극악한 민주화운동 탄압과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남북 간의 대치 상황 등을 그대로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이런 소재 자체나 진행 방식에 불편함을 느끼는 관객층도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설마 이런 내용의 영화를 만들었다고 제작진이 고발을 당하거나 압수수색을 당하는 일은 없겠지요. [헌트]가 다른 영화제와 달리 유독 대종상 영화제에서는 조명상 수상 외에 철저히 외면을 받았던 것도 어쩌면 이런 맥락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보게 되네요.

 

 

[헌트]는 다분히 이념적인 영화가 맞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현장에 투입되었던 군인이 신군부의 잔혹함에 분노하여 독재자를 처단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오랜 기간 남파 간첩으로 활동해오던 안기부의 간부가 전쟁을 막기 위해 대통령 암살을 저지하는 반역을 저지르니까요. 그럼에도 한국적인 신파로는 너무 흐르지 않고 적당히 느와르적인 마무리를 지어주는 부분은 무척 좋았습니다. 아울러 한국의 1980년대를 겪었거나 알고 있는 이라면 [헌트]의 마지막에 흐르는 서글픈 정서를 놓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상의 역사물이고 결국 첩보/액션 장르 영화에 해당되는 작품이긴 하지만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이들의 아픔을 잠시나마 떠올리게 하는 훌륭한 마무리였습니다.

 

 

배우 이정재의 연출 데뷔작이다보니 너무 많은 유명 배우들이 단역으로 우정출연을 해주고 계신 것은 오히려 과유불급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작품들에서라면 당당히 주역으로 활약하셔야 했을 황정민, 이성민, 유재명, 박성웅, 조우진, 주지훈, 김남길 같은 배우들이 잠깐씩 나와서 총 맞아 죽고 막 그러셨어요. 그 중에서도 안기부 현장요원 배역 만큼은 그야말로 현장 분위기에 더 어울리는 단역 배우들을 쓰는 편이 나았을 것 같습니다. [스타워즈]에 얼굴 안나오는 스톰트루퍼로 출연하는 것도 아니고 소소해야 마땅한 배역인데 아는 얼굴이 등장하면 아무래도 관객으로서는 잠시나마 주의가 분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정재와 정우성 두 배우가 함께 출연한 작품이 [태양은 없다](1999) 이후 23년만이라고 해서 의외였습니다. 왠지 중간에 두 세 작품 정도는 더 함께 했었을 것만 같았는데 말이죠.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어 그저 잘 생긴 배우, 과거에 잘 나갔었던 배우에서 그치지 않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의 모습을 보여주는 두 배우 모두 아주 보기 좋았습니다. 특히 [헌트]로 성공적인 감독 데뷔까지 해낸 이정재 배우는 언제 그렇게 영화 내공을 쌓아두었다가 요 근래 갑자기 터뜨리고 계신 것인지 이거야 말로 정말 깜놀입니다. 연출도 연출이지만 영화를 보고나니 공동 각본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점이 더 놀랍습니다. 극장 흥행에는 도움을 못드렸지만 영화 정말 잘 봤습니다. 잘 만드신 영화, 너무 고맙습니다.

 

배우로서의 이정재는 평소 연기력에 약간 제약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마저도 자신만의 스타일로 굳혀가면서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년에 공개될 예정인 스타워즈 드라마 [애콜라이트](The Acolyte)에서도 아마 자신만의 그 스타일을 잘 살려내는 연기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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