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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방송

[영화] 펄프 픽션 (Pulp Fiction, 1994)

by 신어지 2022.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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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1994년 작 [펄프 픽션]을 다시 봤습니다. 영화의 역사 전체와 영화학의 관점에서 최고의 걸작은 아닐지라도 제 개인적인 영화 감상의 이력에서 최고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 [펄프 픽션]을 꼽는 데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누군가 이제 막 본격적인 영화 감상의 출발점 위에 서 있는 사람이 있다면 꼭 봐두어야할 작품이고 강력히 추천해드려야 할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죠.

 

 

영화 한 편이 걸작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자격을 얻으려면 그 자체로 커다란 재미와 감동을 선사해줄 수도 있어야 하지만 그 이후에 만들어지는 다른 작품들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때 가능하지 않나 싶습니다. [펄프 픽션]은 1994년 극장 개봉 당시 '깐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달고 상영을 시작했는데(다음 해 아카데미 각본상 등 수상) 실제로 많은 영화들이 [펄프 픽션]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 있을 정도로 그 영향이 적지 않았습니다. 직접적으로 쿠엔틴 타란티노의 스타일을 모방한 영화들부터 각종 패러디의 양산과 오랜 기간에 걸친 재상영이 이루어져왔죠.

 

#오프닝 : 식사를 마친 후 식당에서 강도질을 시작하는 욜란다(아만다 플러머)와 펌킨(팀 로스)

 

[펄프 픽션]이 이전의 영화들과 가장 달랐던 부분은 흔히 기승전결로 요약되는 시간 흐름에 따른 영화의 서사를 파괴하고 새로운 형식미를 보여주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영화 제목이 의미하듯 화장실이나 집 안 어디에나 비치해두고 읽다 말다를 반복하는 싸구려 종이에 인쇄된 대중 소설처럼 영화도 일관된 줄거리를 시간 순서로만 진행할 필요가 없고 뒤죽박죽인 채로 섞어놓더라도 영화 본연의 보는 즐거움에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반영해서 만들어낸 작품이 바로 [펄프 픽션]이었죠. 이전의 영화들이 기껏해야 과거 회상 장면(플래쉬백)을 넣는 정도였던 것과 달리 [펄프 픽션]의 장면들은 그야말로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입니다. [펄프 픽션]이 선보인 새로운 서사 방식에 평론가들은 호평했고 전세계의 수 많은 관객들 역시 무리 없이 잘 받아들이며 영화를 즐겼습니다.

 

장면 #1 보스에게 잘못을 저지른 일당을 아침 일찍부터 응징하러 온 빈센트(존 트라볼타)와 쥴스(사무엘 L. 잭슨)

 

[펄프 픽션]은 끊임 없는 잡담의 영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이나 스펙타클한 볼거리가 아니라 등장 인물들 간의 대화 속에 재미를 녹여내는데 이는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의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하고 저예산 영화로서 가질 수 밖에 없었던 한계이기도 합니다. 오프닝 크리딧이 끝나고 등장하는 첫번째 씨퀀스는 3년 간 암스테르담에 머물다 돌아온 빈센트 베가(존 트라볼타)와 쥴스 윈필드(사무엘 L. 잭슨)가 아침 일찍 어디론가 차를 타고 가며 나누는 대화 장면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암시하는 대사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영화의 줄거리와는 크게 상관 없는 소소한 이야기나 농담을 '끊임 없이' 주고 받습니다. 이런 특징은 쿠엔티 타란티노의 감독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Reservoir Dogs, 1992)에서도 발견되죠.

 

(이하 스포일러)

 

장면 #2 갱단 두목 마셀러스(빙 라임스)로부터 시합에서 지는 조건으로 돈을 받는 권투선수 부치(브루스 윌리스)

 

[펄프 픽션]을 타임라인에 따라 재구성해보면 크게 4개의 줄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갱단 두목 마셀러스 월러스(빙 라임스)의 부하인 빈센트 베가(존 트라볼타)와 쥴스 윈필드(사무엘 L. 잭슨)가 보스에게 잘못을 저지른 일당을 처단하고 돌아오는 길에 빈센트가 뒷좌석에 앉힌 마빈을 실수로 쏴죽이는데 지미(쿠엔틴 타란티노)의 집에서 윈스턴 울프(하비 카이텔)의 도움을 받아 사고를 수습합니다.

 

두번째는 티셔츠와 반바지로 갈아입은 빈센트와 쥴스가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펌킨(팀 로스)과 욜란다(아만다 플러머)가 강도질을 시작하고 마침 새로운 삶을 살기로 마음 먹었던 쥴스는 이들을 살려보내줍니다.

 

장면 #3 잭 래빗 슬림스 트위스트 경연에 참가한 미아(우마 서먼)와 빈센트(존 트라볼타)

 

세번째는 마셀러스의 지시로 보스의 아내 미아(우마 서먼)와 저녁 식사를 하게 된 빈센트가 약물과용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미아에게 아드레랄린 주사를 놓아 살립니다.

 

네번째는 권투선수 부치 쿨드리지(브루스 윌리스)가 마셀러스에게 돈을 받고 시합에서 져주기로 해놓고 이기면서 친구를 통해 미리 걸어놓은 판돈으로 큰 돈을 벌게 되는데, 소중한 아버지의 손목시계를 찾으러 아파트로 돌아갔다가 빈센트를 죽이게 되고 신호 대기 중에 교차로를 건너던 마셀러스와 마주치면서 추격전을 벌이다가 변태들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마셀러스가 먼저 당하는 동안 포박을 풀고 탈출에 성공한 부치는 일본도를 들고 다시 돌아가 변태들을 처리하여 마셀러스를 구해준 후 자유를 얻습니다.

 

[펄프 픽션]은 이 4개의 줄거리를 시간 순서에 상관 없이 뒤섞어놓고 관객들에게 보여줍니다.

 

장면 #4 어린 부치에게 베트남 포로수용소에서 죽은 아버지의 시계를 전달하는 쿤스 대위(크리스토퍼 월켄)

 

시간 상의 흐름에 따른 일관된 서사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영화이다 보니 [펄프 픽션]에서는 누구 한 명이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등장하는 빈도를 보면 존 트라볼타가 연기한 빈센트 베가가 주인공인 것 같지만 화장실에서 펄프 픽션 읽기를 좋아하던 빈센트는 보스를 배신한 권투선수 부치의 아파트를 지키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순간 부치가 쏜 총에 맞아 허무하게 죽어버립니다. 브루스 윌리스가 연기한 권투선수 부치 쿨드리지나 사무엘 L. 잭슨이 연기한 '목자가 되기로 결심한 악당' 쥴스 윈필드 역시 자신들이 등장하는 씨퀀스에서는 주인공이었지만 영화 전체를 놓고 보면 그 정도의 비중은 아닌 것 같습니다. [펄프 픽션]의 진짜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끝나는지는 아무도 모르듯이(죽은 빈센트만 확실) 주인공도 누구 하나를 특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장면 #5 권투 시합 후 아파트를 미리 빠져나와 기다리고 있던 파비엔(마리아 드 메데이로스)를 만난 부치(브루스 윌리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1992)이 120만불의 초저예산으로 제작, 290만불을 벌어들이며 가능성을 보여주는 수준이었던 반면 [펄프 픽션]은 그 보다 조금 많은 800만불로 제작되어 전세계 2억불이 넘는 흥행 수익을 거둔 성공작으로 남았습니다. [펄프 픽션]의 성공으로 가장 큰 덕을 본 인물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본인을 비롯해 70년대 디스코 열풍의 아이콘이었지만 배우로서는 저평가되고 있다가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존 트라볼타, 무명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 사무엘 L. 잭슨, 이미 헐리웃의 스타급 배우였지만 작품에 따라 비중을 가리지 않고 출연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브루스 윌리스나 우마 서먼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면 #6 길거리에서 추격전을 벌이다가 변태들에게 감금이 된 마셀러스(빙 라임스)와 부치(브루스 윌리스)

 

[펄프 픽션]이 지금까지도 누군가의 최애 영화로 남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로 영화의 OST를 꼽지 않을 수 없을텐데요. 70 ~ 80년대 미국 음악이라고 하면 록음악이나 디스코, 전자음악 정도만 알던 이들에게 당대의 흥겨운 레퍼토리들을 소개해준 영화가 [펄프 픽션]이기도 합니다. [펄프 픽션]의 OST 앨범은 그 자체로 훌륭한 컴필레이션 음반으로 손꼽힐 정도로 좋은 곡들이 많은데 미국 외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좋은 곡들을 영화 OST로 사용해 널리 소개할 기회로 삼는 것은 이후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의 특징 중에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전작 [저수지의 개들]과 이후에 만들어진 [재키 브라운](1997)과 [킬 빌] Vol. 1(2003) & Vol. 2(2004)의 수록곡들도 좋습니다.

 

장면 #7 빈센트의 실수로 일어난 사건을 처리하는데 도와주는 지미(쿠엔틴 타란티노)와 윈스턴(하비 카이텔)

 

개인적으로 [펄프 픽션]은 그나마 여러 번 봤던 작품인데 이번에 다시 본 넷플릭스 스트리밍 버전은 기대했던 이상으로 화질이나 음향 상태가 아주 양호한 편이더군요. 아마도 워낙 유명하고 재상영 기회도 많았던 작품이라 디지털 포맷에 맞춰 깔끔하게 리마스터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덕분이라 생각됩니다. 좋았던 예전 영화는 당시의 필름 포맷으로 그냥 둘 것이 아니라 깔끔하게 디지털 리마스터링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게 벌써 30년 전 영화이긴 하지만 지금 보아도 손색이 없는 작품 전체의 세련된 리듬감이 놀랍기만 합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다른 작품들도 무척 재미있고 아주 잘 만들어긴 했지만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확인시켜주는 작품은 지금까지도 단연 [펄프 픽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장면 #8 식당에서 대치 중인 쥴스(사무엘 L. 잭슨), 빈센트(존 트라볼타), 펌킨(팀 로스), 욜란다(아만다 플러머)

 

이번에 다시 보니 부치(브루스 윌리스)가 아버지의 시계를 찾으러 아파트로 들어가는 장면에서의 긴장감이 상당하더군요. 부치의 아파트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빈센트(존 트라볼타)가 죽는 부분은 모르고 보면 참 황당한 장면입니다. 그 앞에 미아(우마 서먼)와 트위스트 콘테스트에서 우승도 하고 광란의 모험을 겪었던 주인공이신데 그렇게 허무하게 죽다니요. 하지만 영화는 그 보다 앞선 시점에 있었던 이야기로 되돌아가 빈센트를 다시 등장시키죠. 덕분에 관객들은 주요 등장인물의 허무한 죽음이 아니라 계속 살아남아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어처구니 없는 사건 사고를 다 겪고 나서 티셔츠 아래 반바지에 권총을 꽂고 식당 문을 나서는 빈센트와 쥴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아, 내가 참 재미있는 영화 한 편을 봤구나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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