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 방송

[영화] 동사서독 (東邪西毒 / Ashes of Time, 1994)

by 신어지 2022. 11. 21.
728x90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을 리덕스 버전으로 오랜만에 다시 감상했습니다. 국내 개봉 당시 극장에서 관람하고서 영화가 시각적으로 너무나 훌륭한데 마땅히 표현할 수 있을 만한 단어들을 찾지 못했던 기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이후 비디오 대여로 한 번 정도 더 봤을 듯 하나 그마저도 확실하지가 않을 정도로 너무 오랜만에 평소 최고의 걸작 영화들 가운데 하나로 꼽던 작품을 다시 감상했네요.

 

 

하지만 피천득 선생이 수필 [인연]에서 아사코와의 마지막 만남을 "만나지 아니함만 못했다"고 했듯 이번에 넷플릭스를 통해 본 [동사서독 리덕스]는 기존에 갖고 있던 저의 기억 속 [동사서독]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인식하지 못했던 장면 간의 연결이 지금은 너무 거칠게만 보이고 개봉 당시 대형 스크린으로 보고 지금까지 마음 속에 간직해왔던 강렬한 색감이 넷플릭스의 스트리밍 버전에서는 잘 살아나지 않고 있더군요. 지금 접할 수 있는 [동사서독]의 모습이 이런 정도라면 이 영화를 처음 접하게 되는 이들에게 왕가위 감독의 최고 작품이라고 추천할 수가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보다는 아마도 기술적으로 좀 더 완성되고 리마스터링 버전으로도 볼 수 있는 [화양연화]나 [해피 투게더]를 추천하는 것이 '레전드 감독 왕가위'에 대해 좀 더 설득력을 갖게 될 듯 합니다.

 

(이하 스포일러)

 

 

[동사서독]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무협의 탈을 쓴 멜러" 영화입니다. 무협으로 다시 찍은 [아비정전](1990)이라고도 할 수 있죠. 등장 인물들은 김용의 무협 소설 [사조영웅전]에서 차용해왔으나 줄거리는 왕가위 감독에 의해 새로 씌여진 내용이라고 합니다. 여러 인물들의 관계가 얽히고 설키며 각자 이루지 못한 사랑을 그리워하고 또 후회합니다. 리덕스 버전을 통해 다시 본 [동사서독]에서 중심 인물은 구양봉(장국영)과 황약사(양가휘), 그리고 복사꽃 그녀(장만옥)이고 그외 모용연/모용언(임청하), 맹무살수(양조위), 홍칠(장학우), 도화삼랑(유가령), 완사녀(양채니)가 등장합니다. 여기에 번뇌의 근원, 기억을 없애주는 술 취생몽사가 주요 소품으로 나옵니다.

 

 

등장인물들 가운데 남다른 캐릭터 하나를 꼽자면 단연 홍칠(장학우)입니다. 검객 중개인 구양봉(장국영)에 의해 발탁되어 마적단과 맞서 싸우게 되는 청부 검객이지만 구양봉이 절대 받아주지 않았던 가난한 완사녀(양채니)의 요청을 들어주다가 손가락을 잃는 부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게 되죠. 홍칠 자신은 고작 계란 밖에 얻는 것이 없었지만 당신(구양봉)처럼 되지 않기 위해 옳다고 생각한 일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건강을 회복한 뒤 자기를 찾아와 기다리던 아내를 낙타등에 태우고 사막 너머의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납니다.

 

홍칠은 [동사서독]의 등장 인물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사랑에 울거나 후회하는 일이 없었던 인물입니다. 구양봉은 사랑하는 이를 남겨두고 강호에 나섰다가 형에게 빼앗겼지만 홍칠은 결혼한 몸으로 강호에 나섰다가 뒤쫓아온 아내와 함께 계속 길에 나서죠. 두 사람은 훗날 적으로 만나 같은 전투에서 죽게 되는 운명이기도 한데 이는 자막으로만 처리되었습니다. (사랑에 번뇌를 하나 안하나 결국 죽는 건 매한가지?)

 

 

반면에 가장 안타까운 캐릭터는 맹무살수(양조위)라고 할 수 있죠. 아내 도화삼랑(유가령)이 황약사(양가휘)와 바람을 피워 죽일 생각을 가졌으나 취생몽사를 마신 황약사가 기억을 잃은 것을 보고 포기합니다. 점차 시력을 잃어가던 차에 홀로 수 많은 마적들에 맞서 싸우지만 왼손잡이 마적에게 결정타를 맞아 죽게 되고 이후 심하게 훼손된 시체 상태로 구양봉과 홍칠에 의해 발견되지요. [동사서독]을 처음 보았을 때에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과 대치한 양조위의 눈빛 연기가 너무나 강렬했었는데 이번에 스트리밍으로 다시 보니 그 감흥이 되살아나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영화 중반까지 등장하지 않다가(모용연/모용언 남매와 구양봉 장면에서 어렴풋이 등장) 후반부를 장식하며 동사 황약사와 서독 구양봉의 관계를 제대로 풀이해주는 인물이 구양봉의 형수죠. 원래 구양봉과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구양봉이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 형과 결혼을 해버립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구양봉과 함께 하지 못한 세월을 후회하는 모습은 자연스레 '화양연화'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취생몽사를 황약사를 통해 보낸 인물도 다름 아닌 형수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집니다. 황약사는 황약사 대로 취생몽사를 마시며 잊고 싶었던 일들이 있었던 것이었고요.

 

 

이제와 다시 보니 왕가위 감독의 최고 걸작이라고까지 하기엔 기술적으로 좀 미흡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개봉 당시엔 다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시각적 충격과 스토리텔링 방식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던 작품이 [동사서독]입니다. 여러 인물들의 사연과 복잡한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왕가위식 멜러의 감성도 지금 생각하면 좀 허세스러운 감이 없지 않지만 당시엔 나름 멋있게 생각되었더랬죠.

 

왕가위 감독은 [동사서독]의 1994년 개봉작에서 미흡했다고 생각되던 부분을 보완해 2008년 리덕스 버전을 칸 영화제에서 다시 공개했지만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보다는 [동사서독]을 화질 저하가 많이 느껴지는 스트리밍 환경이 아닌 영화관에서 필름 상영으로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것이 최상의 감상 방법이 될 수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 아쉽네요. @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