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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방송

[영화] 정이 (JUNG_E, 2023)

by 신어지 2023.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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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연상호 감독의 신작 장편 [정이]를 감상했습니다. 언제나 남다른 소재와 관점으로 화제성과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켜 왔던 연상호 감독이 드디어 본격 SF 영화까지 내놓아 기대가 되었습니다.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반도](2020)와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정이]는 과학기술 문명은 현재 보다 발달해있지만 해수면 상승으로 대부분의 지역이 수몰되어버린 미래의 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수몰 위기 때문에 대부분 인류가 지구 주변에 80 여 개의 '스페이스 쉘터'를 구축해서 이주했고 일부 쉘터가 분리독립을 주장하면서 전쟁을 겪게 되었다는 설명인데 이는 그야말로 상황에 대한 설명일 뿐, 영화 속 이야기의 대부분은 옛 빌딩 상층부만 물 위에 남겨진 미래의 한국에서 진행됩니다.

 

(이하 스포일러)

 

 

미래의 기술 발달로 인간의 모든 기억과 의식을 복제해 컴퓨터나 안드로이드, 또는 복제인간에게 이식해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는 상상은 이제 그리 낯선 설정도 아닙니다. [정이]는 AI로 움직이는 매우 성능 좋은 로봇 기술과 뇌 복제와 조작 기술을 '당연한 전제'로 삼고 출발하는 SF 영화입니다. [블레이드 러너]나 [공각기동대]와 같은 동류의 레퍼런스들로부터 [정이]가 한 걸음 나아간 부분은 다소 거친 설정이긴 합니다만 복제된 인간 의식의 인격성, 즉 법적 지위에 차별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 정도인 것 같습니다. 정부가 아닌 민간 기업에게 양도된 뇌 데이터와 인간 의식은 복제와 재사용의 권한이 기업에게 넘어가기 때문에 전투 용병이든 위안부이든 기업이 원하는 어떤 상품으로든 활용될 수 있다는 얘기죠.

 

 

쉘터 전쟁으로 전세계적인 영웅으로 남게된 전설적인 용병 윤정이(김현주)의 의식이 크로노이드 회사에 복제되어 전투 로봇 제작을 위해 테스트 단계에 있는 중이고 그녀의 딸 소현(강수연)은 어른이 되어 직접 크로노이드의 연구소 팀장으로 개발 과정을 주도하고 있는데, 40 여 년간 이어졌던 쉘터 전쟁이 마침내 휴전 협정을 맺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서 회사는 용병 로봇 개발을 종료하고 그간의 연구 성과를 가정용 AI와 로봇 상품화로 전환하게 됩니다. 이에 어머니의 의식이 엉뚱한 용도(?)로 복제 활용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소현은 정이의 의식에게 과거와 회사로부터의 자유를 선물해주기로 합니다.

 

 

개인적으로 [정이]는 다시 한번 연상호 감독의 연출력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품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되는 작품입니다. 그럭저럭 볼 만 했던 비주얼 부분과는 달리 각본 상의 구성이나 이야기의 전개가 충분히 치밀하게 설계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이 많은 편인데 그런 와중에도 작품 전체의 밸런스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요소는 강수연의 캐스팅입니다. 어찌보면 인간 용병과 로봇 정이를 모두 연기한 김현주 만큼이나 출연 비중이 높은 배역인데다가 관객 입장에서는 오히려 강수연이 연기한 소현이라는 인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고인이 되신 강수연 배우의 캐스팅은 작품 전체를 고려했을 때에는 무리수였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습니다. ([오징어 게임] 때와는 다른 이유로 영어와 일본어 더빙을 들어보고 싶어지네요)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명언을 남긴 강수연 배우였지만 [정이]를 감상할 때 느껴지는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움의 상당 부분이 소현을 연기한 강수연 배우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연상호 감독은 애초부터 강수연 배우의 살아 생전 모습을 남기기 위한 목적으로 [정이]의 제작을 기획했던 것일 수도 있고 해외 투자자를 설득하기 좋은 강수연의 캐스팅 덕분에 [정이]에 대한 제작이 가능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오랜 기간 은둔하다시피 살던 강수연 배우의 마지막 연기하는 모습을 [정이]를 통해 볼 수 있었다는 건 좋았지만 [정이]의 완성도를 위해서는 해서는 안될 선택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생각했던 이상으로 강수연 배우의 비중과 존재감이 두드러졌던 [정이]였지만 그로 인해 작품에 대한 아쉬움은 더 커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결론입니다. 뛰어난 인간 용병의 의식을 대량 복제하겠다는 생각 만큼이나 전설적인 여배우를 캐스팅해서 좋은 작품으로 남기겠다는 생각 역시 좀 허술한 면이 있었던 것 아닌가 싶네요. 좀 더 적절한 캐스팅과 세밀함이 느껴지는 연출력으로 인간 의식 복제와 AI, 로봇 기술의 향연이 언급되는 미래 사회에서 인간의 '정'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으로 회자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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