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채털리 부인의 연인 (Lady Chatterley's Lover, 2022)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공개된 2022년 버전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감상했습니다. 영국 작가 D. H. 로렌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수 많은 버전의 영화들 가운데 최신작인 거죠. 왠지 안봐도 뻔히 다 알 것만 같은데 막상 지금까지 한번도 원작을 읽거나 영화화된 작품을 감상해본 일이 없어서 이번에 처음으로 감상을 해봤습니다. 그래서 원작이나 기존 영화들과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네요.
세상의 수 많은 부인 시리즈들 가운데에서도 채털리 부인이 단연 원조집이 아닐까요. 원작 소설이 처음 출간되었던 1928년에도 외설적인 언어와 성적 묘사 논란으로 인해 무삭제판이 정식 출간된 시기는 미국이 1959년, 영국이 1960년도였다고 하네요. 이후로 수 없이 많은 버전의 영화화가 진행되었고(제작비가 단연 저렴하게 드는 내용인지라) 엇비슷한 내용의 아류작들도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저를 포함해서 정말로 원작을 제대로 읽거나 감상한 경우가 몇이나 될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만 해도 여태 제목이 [채털리 부인의 "사랑"]아닌가, 혹은 ["차타레" 부인의 사랑](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1981년 작)은 아니었나 했으니까요.
(이하 스포일러)
이번 2022년 넷플릭스 버전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 역시 안봐도 뻔한 그 스토리 맞습니다. 귀족 부인이 하인과 바람이 나서 욕정을 불태우는 그렇고 그런 내용이죠. 그런데 보기 전의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남작의 귀공자 클리포드 채털리(매튜 더켓)는 코니 리드(엠마 코린)와 런던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하반신 불구가 되어 돌아오고, 아버지로부터 상속 받은 방대한 토지와 저택을 지키러 시골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자식을 원하지만 본인 능력으로는 안되는 클리포드가 먼저 코니에게 다른 남자의 아이라도 가져서 후대를 잇자고 제안하는 부분은 의외였습니다. 무슨 해괴한 소리냐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라도 하는게 맞는 건가 싶던 코니는 점차 남편의 관심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자신을 위로받기 위해 사냥터 관리인으로 고용된 올리버 멜러스(잭 오코넬)와 관계를 갖습니다. 올리버는 그냥 마당쇠는 아니고 나름 지적이고 군대에서는 장교였으며 부인이 바람 나 다른 사람과 살면서도 이혼은 해주지 않고 쥐꼬리 연금의 절반을 요구하는 그런 상황의 남자였죠.
이번 [채털리 부인의 연인]도 청소년관람불가의 기준선을 훌쩍 넘기는 장면이 있는 건 맞는데 프랑스 출신의 배우 겸 여성 감독 로르 드 클레르몽-토네르가 연출한 성애 장면은 에로틱하기 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남녀의 발가벗은 모습 그대로를 표현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는 느낌을 줍니다. 무엇보다 채털리 부인, 코니의 임신을 계기로 영화의 초점은 아예 불륜과 외설의 짜릿함이 아니라 등장 인물들이 놓여진 계급의 문제, 그리고 부의 상속과 인간성 사이의 고민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주인공들의 주변 인물들, 특히 코니의 상황을 알게 된 언니 힐다(페이 마세이)와 아버지(안소니 브로피)의 반응은 현대적인 동시에 지극히 현실적으로 느껴지더군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그저 생활이 지루해서 활력소가 필요했던 젊은 마님과 마당쇠의 일시적인 일탈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는 사회적 맥락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열렬히 지지해주는 의외로 건전한 흐름의 작품이었습니다.
"똑같이 숨쉬고 밥 먹는다고 해서 같은 종류의 인간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적당한 방법으로 후대를 이을 자식을 얻고 싶어하는(그러나 남들에게는 알려지지 말아야 하는) 부자 귀족 남편이 있고 그 보다는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를 낳아 기르며 살고 싶은 부인, 그리고 가진 것 없이 하인으로 일하는 신세이지만 사랑하는 여자가 있고 그 여자로부터 얻은 자식을 빼앗길 수도 있는 처지의 남자라는 기본 구도는 다루기에 따라 의외로 다양한 버전을 만들어낼 수 있는 퍼즐 조각처럼 느껴지는데요. 그 자체로 다양한 각색과 버전들을 양산해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달라 보이는 후대의 작품들에게까지 직간접적인 영감을 제공했을 법한 설정이라 생각됩니다. 아무튼 이번 넷플릭스 버전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의외로 여주인공의 굳은 심지 하나로 명쾌하게 상황을 돌파하며 원하는 자리에 안착하며 마무리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미국 배우 헤더 그레엄을 연상케 하는 외모의 엠마 코린은 영국 드라마 [더 크라운] 시즌 4(2020)에서 다이애나 왕세자를 연기했던 이력의 소유자더군요. 전설적인 에로물의 원조로 기억되어야 마땅할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워킹타이틀 제작의 감성 영화처럼 보일 수 있게 해준 데에는 각본을 쓴 데이빗 맥지와 로르 드 클레르몽-토네르 감독 연출의 공이 가장 크겠지만 지금의 관객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새로운 채털리 부인을 선보인 엠마 코린의 공헌이 또한 적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생각해보면 딱히 트집 잡을 만한 구석 없이 잘 만들어진 영화였습니다. 그럼에도 감상 시 후방 주의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