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2006년 작품, [칠드런 오브 맨]을 다시 감상했습니다. 개인적으로 10점 만점에 10점인 영화들 가운데 하나로 꼽아오던 작품인데 오래 전에 처음 감상한 이후 이번이 두번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세부 사항은 물론이고 전반적인 분위기조차도 너무 새롭게 보이더군요. 이 영화가 미래 세계를 이렇게까지 어둡게 묘사하고 있었구나 하면서 봤습니다. 하지만 그 어두운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바로 이 영화의 진가라고 할 수 있죠. 빛의 등장이 주는 강렬한 인상을 더 하기 위해 어두운 부분을 일부러 더 어둡게 묘사했던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영국인 여류 소설가 P. D. 제임스의 1992년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 [칠드런 오브 맨]입니다. 영화 속 2027년의 미래는 인류에게 절망적이기만 합니다. 전세계가 내전과 질병, 경제 시스템의 붕괴에 시달려 무너져가는 와중에 영국만이 그나마 치안을 유지하고 있어서 여기저기서 몰려드는 난민 문제가 심각합니다. 난민들을 붙잡아 추방하고 있는 정부와 그에 맞서 난민 인권을 위해 싸운다는 명목으로 폭력도 불사하는 과격 테러 조직이 활동하고 있죠.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18년째 세계 모든 여성들이 임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초고령화가 아니라 아예 멸종 위기에 직면한 인류이기에 미래를 위한 건설적인 논의 자체가 잘 안되는 상황입니다.
(이하 스포일러)
임신한 여성이 유산을 하고 더이상 임신이 안되는 상황이 어떤 질병에 의한 것이라면 세상의 누군가는 그 질병에 면역성을 갖고 있을 수도 있는 거겠죠? 어찌보면 [칠드런 오브 맨]은 좀비 바이러스에 항체를 갖고 있는 누군가가 인류의 희망이라는 설정의 몇몇 좀비 아포칼립스 영화들과 비슷한 설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칠드런 오브 맨]에도 8개월째 임신 중인 난민 여성이 발견되어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작동을 하는데, 이 여성과 아이를 질병 극복을 위한 과학자 집단 '휴먼 프로젝트'로 보내려는 주인공과 임신한 여성이 난민이라는 사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반정부 테러리스트 집단 사이에 도망자-추격자 관계가 형성됩니다.
영화의 압권이 되는 장면들은 주인공 일행이 '휴먼 프로젝트'의 배 투모로우호에 승선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난민 수용소로 들어가면서 시작됩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반정부 테러 집단이 난민 수용소에 난입하고 이를 진압하려는 정부군의 전투 장면은 왠만한 전쟁 영화의 참상을 방불케 하는데요, 이 와중에 갓 태어난 아기와 산모를 구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정말 아슬아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전투 현장을 빠져나오는 순간 난민들과 정부군 모두가 새로 태어난 아이에 주목하고 길을 내어주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영화 전체가 이 장면을 위해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명장면입니다.
영화 속 대사 중에 주인공 테오(클라이브 오웬)의 과거사가 언급되는데 연인 줄리안(줄리안 무어)과의 사이에 아들 딜런이 태어났지만 2008년 '독감 팬데믹'으로 죽었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사건 사고는 계속 있어오긴 했지만 지난 2년 간 코로나 팬데믹을 경험한 시점에 2006년 개봉 영화에서 이런 언급을 발견하는 것은 새삼 놀랍기만 합니다. 인류의 희망이 된 성모와 성자, 아니 난민 여성 키와 그녀의 갓난 아기는 딜런과 함께 조각배를 타고 수용소를 빠져나오는데 성공하고 키는 자기 아이의 이름을 딜런이라 짓겠노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테오는 전투 현장에서 입은 총상으로 숨을 거두고 이들이 탄 조각배는 투모로우호에 의해 발견이 되며 영화가 마무리됩니다. 좀 작위적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앞뒤가 잘 맞아 떨어지도록 구성된 감동적인 서사와 결말 아닌가요.
원작 소설은 설정만 비슷할 뿐 영화와는 많이 다른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작가 P. D. 제임스는 완성된 영화를 보고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고 하네요. 클라이브 오웬, 줄리안 무어, 마이클 케인, 치웨텔 에지오포, 찰리 허냄, 대니 허스턴 등이 출연했고 훗날 [그래비티], [버드맨], [레버넌트]로 아카데미 촬영상을 3연속 수상하게 되는 엠마누엘 루벤즈키의 원테이크 촬영이 이 작품에서부터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에단 호크와 기네스 팰트로 주연의 [위대한 유산](1998)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이후 [이투마마](2001)와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2004)의 차기작으로 이 영화를 연출했는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너무 암울했던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흥행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7년만에 내놓은 [그래비티](2013)가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했고 이 성공을 기반으로 2018년 작 [로마]와 같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본 [칠드런 오브 맨]은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상황이 그닥 친절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또한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어두웠었나 싶을 만큼 미래를 너무 암울하게 그리고 있는 점이 새로웠습니다. 넷플릭스의 한글 자막도 좀 별로더군요. 그럼에도 마지막 결말 만큼은 제가 왜 이 영화를 그토록 좋아했었는지를 떠올리기에 충분할 만큼 임팩트가 여전했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 이 임팩트만 기억나고 중간의 빌딩 과정을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 점 역시 [칠드런 오브 맨]의 특이한 점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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